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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운인vs광운인손님은 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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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27  09:4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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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현 (경영학부·17) 서비스업에 종사하다 보면 ‘손님은 왕이다’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이 말의 본래 의미는 서비스업 제공자들이 ‘보다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고자’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몰상식한 소비자들이 이 구절의 뜻을 ‘손님이면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뜻으로 오해하고 배려 없는 모습을 보인다. 손님들의 업주들에 대한 배려 없는 모습의 결과로 나온 것이 ‘노키즈존(No Kids Zone)’이다. 사업자들의 입장에서는 노키즈존을 시행하는 것이 당연할 수 있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그들에게 영유아와 무책임한 부모라는 손님으로 인해 손해가 발생한다면 이들을 사업장에 들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실제로 아이들이 사업장에서 다른 손님들에게 피해를 끼쳐 매상의 감소로 이어지거나 아이의 잘못으로 안전사고가 일어나더라도 업주 입장에서는 보호받을 수 있는 법안이 없는 상황이다. 사업장 내에서 아이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사고를 배상해야 하는 판례 중 하나로, 2011년도에 어린아이가 식당 내에서 달려가다 종업원과 부딪혀 뜨거운 물을 쏟아 화상을 입은 경우가 있다. 법원에서는 업주의 책임을 70%로 매겨 4천만 원 가량을 보상하게 했다. ‘업주에게 매장의 안전 관리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와 ‘판단 능력이 부족한 아동’이라는 이유가 더해져 사업자에게 많은 과실이 인정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업주에게 어린 아이들과 그들을 방임하는 무책임한 부모들을 무조건적으로 ‘손님’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용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손님의 위치에 선 갑질일 뿐이다. 노키즈존을 반대하는 입장은 문제가 되는 아이들과 부모는 ‘일부’이며 노키즈존을 도입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나아가 선량한 대다수의 부모를 차별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실제로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와 부모는 일부일 수 있다. 그러나 ‘소수 때문에 다수가 제한을 받는’ 상황을 차별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업주의 입장에서는 불특정 다수의 고객 중에서 ‘일부’의 부모와 아이들을 ‘진상’으로 구분해 낼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노키즈존을 시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양심적인 손님이 많다고 하더라도 판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1%의 진상 손님이 끼치는 손해는 업주의 입장에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노키즈존은 표면적으로는 영유아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유아들 보다도 영유아들을 관리하지 못한 무책임한 부모들의 출입을 금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키즈존을 차별이라고 외치기 이전에 부모로서 아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관리 할 수 있다면 노키즈존은 사라지고 나아가 ‘웰컴키즈존’이 생겨날 것이다. 뱃속에서부터 점잖은 아이는 없다 김선우 (국어국문학과·14) 요새 인터넷 서핑을 꽤나 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주 보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혐오’일 것이다. 사회가 삭막해져 감에 따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갖은 종류의 혐오 이슈가 정보의 바다에 부유하고 있다. 그중 ‘노키즈존’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노키즈존이란 특정 나이 이하의 어린이들의 출입을 금지한 곳을 말한다. 노키즈존이 생겨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어린아이들이 상가의 영업을 방해한다는 의견 때문이다. ‘애가 울면 시끄럽고, 뛰어다니면 위험하고, 저절로 손님들은 그 가게에 발을 끊게 될 것이니 우리 가게는 아이 손님을 일절 받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이다. 하지만 아이는 원래 그렇다. 불만이 있으면 칭얼거리고, 그래도 개선이 되지 않으면 울고 만다. 아이가 왜 아이인가. 5살짜리 아이가 점잖게 앉아서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며 신문을 읽을 수는 없는 법이다. 노키즈존은 원하는 손님을 가려 받을 수 있는 업주의 권리라는 주장을 쉽게 볼 수 있는데 필자는 이것이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라는 속성은 손바닥 뒤집듯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이 공간은 민소매를 입고서 출입할 수 없습니다’라는 팻말이 걸려있는 곳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민소매를 입고 있던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아이는? 아이는 들어올 수 없다는 팻말을 보았다고 그 아이가 바로 어른이 돼서 들어갈 수 없다. 마치 ‘한국인 출입 금지’와 같은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특성으로 누군가를 통제한다는 것, 그것은 명백한 차별이다. 민소매를 입은 한국인을 민소매를 입었다는 이유로 출입을 금지 시켰다면 그 공간의 규율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출입 금지 시켰다면 인종차별인 것처럼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키즈존에 가면 되지 왜 굳이 노키즈존에 와?’라고 말하는 의견 또한 ‘흑인 전용 시설이 있는데 왜 굳이 백인 전용 시설 쓰려고 해?’와 같은 차별이다. 식당에서 시끄럽게 울고 뛰어다니는 아이가 있다면 그것은 부모의 잘못이 크다. 아이의 잘못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아이는 그게 잘못인지 모른다. 그래서 아이인 것이다. 하지만 그 부모는 그것이 잘못임을 알고 아이를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아이를 가르칠 기회를 줘야 한다. 필자는 그것이 사회화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공공장소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런 훈육 과정을 거치며 아이는 성장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노키즈존으로 아이의 행동반경을 통제해버린다면, 과연 그 아이가 공공장소 예절을 배울 수 있을까? 미성숙한 아이가 날 배려하길 바라는 것보다 성숙한 내가 그 아이를 배려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생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작권자 © 광운미디어위원회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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