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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27  09:5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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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의 본질과 죽음에 관한 고찰 박용재 (경영학부·13 ) 사실, 보리스 비앙의 <세월의 거품>이라는 작품을 접하게 된 계기는, 미셸 공드리의 <무드 인디고>라는 영화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보리스 비앙의 작품을 영화화한 미셸 공드리의 상상력과 표현 방식은 원작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감각적인 색감과 머리로 이해되지 않은 매력적인 대화들이 나로 하여금 원작자의 생각을 궁금하게 하였다. 소설에 전개되는 이야기 자체들은 “도대체 왜” 혹은 “설마”라는 물음표가 머리속을 가득 채우게 하고 또, 이는 이전까지 내가 경험해왔던 비현실적인 이야기의 맥락과는 분명 너무나 달랐다. 그 이유를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우리가 현실에서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대화와 사건들이 책의 세계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취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는 상상과 현실의 구분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기존에 여러 형태로 서술된 ‘상상’의 이야기는 비현실적 상상력이 현실과 완전히 구분되어, 실제와 유리감을 생성한다. 이러한 유리감의 밑바탕에는 ‘배제와 생략’이 있다. 하지만, <세월의 거품>이 풀어내는 이야기는 현실과 상상을 뒤엉킨 실타래 자체를 보여준다. 이 실타래를 풀려고 하는 독자의 유일한 해답은 실타래를 실타래로 두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자의 머리속에서 형성된 체계의 기준 자체는 뒤엉킴의 해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월의 거품>은 분명 다른 작품과는 달랐다. 어떤 물음이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설사 이것이 속임수라 하더라도 그것은 내게 전혀 무리가 되지 않는다. 줄거리는 이렇게 짧게 정리 될 수도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생활을 이어가던 ‘콜랭’은 그의 친구 ‘시크’와 ‘이시스’가 키우는 강아지의 생일파티에 우연히 초대를 받게 된다. 이 생일 파티에서, ‘콜랭’은 ‘클로에’라는 매력적인 여성과 만나게 되어 사랑에 빠진다. ‘클로에’와 사랑에 빠진 ‘콜랭’은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지만, ‘클로에’는 폐에 수련이 자라는 병에 걸리게 된다. 그녀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그녀의 치료를 위해 ‘콜랭’은 그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제까지 해본적이 없던 육체노동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조건 없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병세는 악화되어가고 종국에는 ‘클로에’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세월의 거품>이 전개하는 ‘콜랭’와 ‘클로에’가 만들어내는 불행하지만 영원한 사랑 이야기를 단순한 연애소설로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두 주인공이 만들어내는 연애 이야기가 펼쳐지는 세계 자체가 이해되지 못하는 문장과 물음표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지겹고 누구나 예측 가능한 사랑이야기 보다는 그로테스크적 혹은 이상한 세계 자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억지를 좀 부린다면,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사랑 이야기는 내게는 전혀 의미가 없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소설이 보여주는 서사적 내용은 어떠한 효용가지도 창출하내지 못하는 ‘무’의 영역으로 그 자취를 감춘다. 결국, 내게는 이런 물음이 남았다. 우리는 왜 이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무엇이 서사 속 세계관을 비정상적이라고 느끼게 하는가, 이해할 수 없는 기호와 장면으로 가득한 이야기 속 세계가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와 기능을 지닐 수 있는가, 죽음이 가진 근본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소설이 보여주는 세계 자체는 독자를 무척이나 고통스럽게 한다. 뱀장어가 나오는 수도관, 스케이트장에서 충돌로 죽은 사람을 처리하는 청소부, 폐에 수련이 자라나 여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 등의 모습은 독자로 하여금 이해가 불가능한 영역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독자의 시도는 어떠한 노력에도 결국 헛수고로 돌아간다. 이러한 사실 자체는 독자를 무기력하게 한다. 그렇다면, 독자가 느끼는 무기력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러한 물음의 답을 하기 위에서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존재 방식에 관한 이야기가 선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열쇠는 ‘푸코’의 저서인 <말과 사물>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벨라스케스’의 작품인 <시녀들>(1656년)을 통해 논의를 출발하기로 하자. 사실 이 작품이 현대적 시점에서 가장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재현 그 자체가 아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포함하려 한 시도 그 자체에 있다. 그 당시 다른 회화 작품이 대상의 재현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에,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재현의 대상이 아닌 재현의 대상 뒷면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화가는 이에 그치지 않고, 거울을 통해 재현의 대상인 왕과 왕비의 모습까지 표현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포함하려 한 화가의 시도는 그림에 평면을 뛰어넘어 그 평면이 마주하고 있는 공간, 즉 관객의 공간까지 포함하려는 과감한 시도를 한 점에서, 재현의 한계를 벗어나보려 한 것이다. 단순한 평면에 ‘거울’ 하나를 배치함으로써 입체성이 확보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이 회화가 어떠한 측면에서 가치를 지닐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거울 속에 아주 작게 묘사된 ‘왕과 왕비’의 존재이다. 이는 세계가 우리에게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흐름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자. 그림 속 사람들의 공손한 시선, 어린아이와 난쟁이의 놀란 모습에서 이미 ‘왕과 왕비’가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왕과 왕비’는 가장 흐릿하고 가장 비현실적이며 가장 손상되기 쉬운 이미지이다. 그들은 한 번의 움직임, 약간의 빛만으로도 쉽게 사라질 수 있다. 그들은 인물 중에서 가장 소홀히 취급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 뒤로 교묘하게 끼어들고 생각지도 않은 공간을 조용히 차지하고 있는 이 영역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왕과 왕비’는 가장 덧없고 가장 비현실적인 형태이다. 역으로 그들은 외부에 있음으로써, 비가시성으로 물러남에 따라, 재현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중심이 된다. ‘왕과 왕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세계에 체계와 구성요소에 질서를 부여하고, 인간은 ‘왕과 왕비’가 허락한 세계를 보고 들으며 느낀다. 이러한 세계는 재현의 공통장소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틀을 인간에게 제공하여 ‘그것’을 ‘그것’으로 인지하게 한다. ‘왕과 왕비’의 존재는 푸코가 제시한 ‘에피스테메’이다. 에피스테메는 인간을 둘러싼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이다. 에페스테메의 가장 중요한 작동 방식은 배제와 생략에 있다. 질서화 된 코드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배제한다. 수 많은 특성을 지닌 수 많은 연필을 ‘연필’로 규정짓는 것. 에피스테메는 연필이 ‘지우개’가 될 가능성을 배제하고 생략한다. 반대로, 인간이 연필을 ‘연필’로 인식하는 것. 인간에게 세계의 질서는 연필이 ‘지우개’될 수 없음을 강제한다. 에피스테메가 제공하는 동일성의 강제는 사물이나 상황을 인간들로 하여금 같은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 기준을 제시한다. 역으로, 사물이나 상황이 다른 것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을 제거하고 억압한다. 그렇다면, 인간 존재는 에피스테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질서화 된 코드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사유한다. ‘왕과 왕비’가 부여한 질서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한다. 이는 인간에게 자유는 없다는 말로 요약된다. 정작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는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 지와 같은 하찮은 것뿐이다. 이러한 인간 주체의 비자율성의 핵심은 인간이 욕망하는 것은 이미 자신들이 원할 것을 미리 알려주는 체계와 규범 즉, 상징계적 질서에 의해 부과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상징계적 질서를 벗어나 인간이 해방될 수 있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 자체라는 라캉의 주장과 연결된다. 진정으로 인간 본연의 ‘나’라는 존재가 무엇을 원하는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 단지, 시스템에 의해 부과된 욕망만이 존재할 뿐이다. 시스템은 우리의 주인이고 우리는 시스템의 노예일 뿐인 것이다. 이제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세월의 거품>이라는 작품에서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독자가 느끼는 무기력함의 밑바탕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에피스테메에 의해 부과된 체계성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을 제시한다. 이러한 기준에서 세계는 재편된다. 맞고 틀리고는 ‘왕과 왕비’에 의해 결정된다. 보이지 않지만 가장 실존적인, 가장 힘이 강력하지만 만질 수 없는 경계가 우리를 지배한다. 이 경계가 ‘정상성’의 기준인 셈이다. 이 정상성의 영역은 경계를 기준으로 경계 밖의 것을 이상한 것 혹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이를 끊임없이 경계 안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우리가 <세월의 거품>이 제시하는 세계관을 이상한 것으로 여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모두는 하얀 모피로 둘러싸인 자동차, 값싼 장례식에서 죽은 클로에가 잠들어 있는 관을 함부로 다루는 일꾼들 등의 이해되지 않는 장면을 정상성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것은 세계가 부여한 질서에서 정의되지 않는 이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제시한 장면들은 경계의 외부에 있다. 그것은 존재하는 시스템에 의해서 절대로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이 ‘그것’이 아닐 때, 연필이 ‘연필’이 아닌 ‘지우개’가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들을 이상하고 기괴한 것이라고 여긴다. 우리가 이 소설을 접했을 때, 만나게 되는 세계관은 질서에 굴복한 우리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몬스터’일 뿐이다. 사물과 현상을 인간이 인식하는 방식에는 정상성의 영역이 어김없이 작동된다. 이는 불가항력적이고 필연적이다. 누구도 이러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으며, 부정할수록 더욱 강력해진다. 인간은 이러한 체계속에 종속되었고, 체계는 인간의 내면에 확고히 자리잡았다. 확실한 것은 인간과 시스템이 맺고 있는 이 기묘한 관계가 비가시성과 실존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가시적이고 실존적인 관계에서 우리의 구속을 해방시킬 무엇인가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정상성의 범위에서 규정된 경계를 뛰어 넘을 뿐만 아니라, <세월의 거품>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상하고 논리적이지 않은 어떤 것들을 ‘초현실주의’라는 것쯤으로 하자. 정상성의 경계 밖에 있는 ‘초현실주의’는 인간에게 필연적 질서를 부여하는 시스템과의 관계에서 그 본질이 드러난다. 바꿔 말하면, 비가시적이고 실존적인 언어, 지각, 실천의 코드들에게 이상한 것들이 어떠한 가능성과 의미를 포괄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초현실주의 자체의 맥락과 본질을 살펴보도록 하자. 초현실주의를 역사적 배경과 맥락으로만 살펴보자면, 다다이즘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반 예술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다다이즘은 예술이 도달하고자 하는 분위기, 형식과 주제를 거부, 부정함으로써 예술에 대한 규정을 무가치한 것으로 돌려놓는다. 다다이즘 그 자체는 기존 작품을 파괴하고 붕괴시킴으로써 예술의 정상성 범주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얻었지만, 스스로를 부정하는 논리적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다다이즘이라는 하나의 예술 사조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은 르네상스 이래로 정상적이고 규범과 기준으로 여겨지던 인간의 이성과 합리주의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게 하였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주의에 대한 결과가 전쟁이라는 인류 스스로의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일으킨 전쟁은 인간의 문화적, 사회적 체계를 완전히 붕괴시킴으로써, 인간 스스로가 기존의 체계에 대한 저항과 세계와 자아와의 새로운 관계 수립을 활로를 모색하게 한다. 초현실주의는 쇠퇴한 다다이즘을 뒤이어 체계적 정리가 부재했던 논리의 이면, 꿈과 무의식, 광기에 대한 발전적 계승을 시도한다. 다다이즘이 예술적 관습과 규범 자체를 파괴시켰다고 한다면, 초현실주의는 기존에 합리주의과 이성에 의해 억압된 영역을 해방시킴으로써, 정상정에 대한 규정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한편, <세월의 거품>에서의 세계관은 단순히 초현실주의의 색채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무엇인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한 느낌을 가지게 된 이유를 반추해보니, 그것은 바로 웃음이었다. 이를 언급하기 위하여 책에서 가장 크게 웃었던 장면을 소개하겠다. 콜랭과 클로에의 결혼식이 끝난 후 두 사람은 성당의 성기실 안에 선 채 욕설을 듣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많은 욕설이 감사하다며 인사를 사람들과 여러 차례 주고 받는다. 앞의 장면들을 비롯하여 이 소설이 희극성의 속성을 지닐 수 있었던 이유는 ‘기표’와 ‘기의’가 두 세계에서 각기 다르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한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고, 다른 세계는 극 중 두 인물이 살아가는 소설 속 세계이다. 두 세계는 욕설이라는 언어적 형식을 공유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가 전혀 다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결혼식에서의 욕설은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한 저주와 비판을 의미한다. 하지만, 극 중 인물이 살고 있는 소설 속 세계에서 결혼식에서의 욕설은 두 주인공간의 사회적 결합에 대한 축복을 뜻한다. 두 세계는 공통적 기표를 공유하지만, 기의성의 간극은 매우 크다. 이러한 간극은 독자에게 웃음을 유발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세계의 관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희극성 자체를 강화하는 요인이다. 사실 희극성은 사람과 사람 혹은 민족과 민족 나아가 국가와 국가가 공통 체계를 공유할 수 있다면 즉시 해체된다. 그들이 상대방에게 느끼는 이질감과 이상함이 제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통된 체계가 공유될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앞의 두 세계가 가지는 희극성은 각각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정상성의 영향력이 미치는 힘이 강력할수록 극대화된다. 바꿔 말하면, 각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 혹은 ‘그들’에게 그 세계가 진실하면 진실할수록 희극성은 심화된다는 말과 동일하다. ‘연필을 연필’이라고 믿는 세상 사람들과 ‘연필을 지우개’이라고 믿는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믿는 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두 세상의 간극에서 오는 희극성은 더욱 심화된다. 앞의 장면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초현실주의는 희극성을 촉발시키는 촉매 작용을 하기도 한다. 역으로, 희극성은 초현실주의를 보장하지 못한다. 그들은 충분관계에 의해 서로를 지탱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발생하지 못할 초현실주의적 장면 그 자체는 공유되지 않을 속성을 가정을 기반으로 다른 세계의 논리를 웃음과 희극적 요소로 변모하게 한다. 희극적인 효과라면 모두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를 웃게 만드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부조리한 것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는 논리이다. 이러한 부조리함은 현실에서는 완전히 이상한 체계를 지니지만, 다른 세계에서는 그것이 완전한 확실함과 정확성을 가지고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세상에서도 현실 세계와 똑같은 관념의 집합을, 고정 관념을 지배하는 것과 같은 논리를 볼 수 있다. 꿈은 이러한 작동 원리를 가장 잘 보여준다. 꿈의 세계에서 이뤄지는 모든 사건과 행동은 그것이 현실 세계의 정상성에서 구속 받지 않고 그 세계의 논리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 받기 때문이다. 꿈에서 하는 행동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현실 세계에서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계 밖의 영역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꿈의 세계에서의 기괴한 행동은 그들의 논리에 편입되어 당위성을 확보한다. 우리가 보고 웃게 되는 모든 것은 우리가 허위임을 아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만약 꿈 속에서 듣게 되면 참이라고 간주된다. 이러한 점에서, 희극적 부조리는 꿈을 지배하는 부조리와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꿈꾸는 사람이 상상하기에는 너무나 자연스럽지만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의 이성으로서는 무척 거슬리는 것이어서, 그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것에 대해 정확하고 완전한 개념을 제시해 주기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자연스럽고 무자비한 논리는 꿈과 부조리의 세계를 가차없이 파괴한다. 그것들은 경계 밖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현실 세계의 논리와 같아질 미약한 가능성이 존재하더라도 거대하고 폭력적인 ‘왕과 왕비’는 그것들을 재조립하는 동시에 각자의 위치에서의 최선을 요구한다. 체계는 폭력의 형태를 취한다. 무엇도 그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 현실은 희극적 부조리와 꿈의 상태를 한치도 용납하지 않는다. ‘왕과 왕비’는 가장 탄탄하고 큰 성벽으로 보호된다. ‘왕과 왕비’는 현실 세계에서 가장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세월의 거품>에서 보여주는 이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웃음을 유발하는 체계는 현실의 체계로 인식하고 사유하는 우리들에게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색채를 띤다. 하지만, 소설 속 세계를 살아가는 콜랭과 클로에 같은 극중 인물에게 그것들은 진리이며 항상 참이 된다. 각각의 영역을 지배하는 논리의 구조가 공유되지 않는 이상 서로는 서로에게 이상한 것이 된다. 이러한 단절성에서 우리 삶을 지배하는 정상성의 영역은 다른 세계를 생략하고 배제함으로써, 그 권위를 공고히 한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성격은 끊임없는 부정을 통해 유지된다. ‘그것들’ 자체가 권위를 유지하는데 거슬릴 뿐만 아니라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콜랭과 클로에의 세계는 끊임 없이 억압받는다. 현실의 체계라는 강력하고도 유일한 구조라는 이유 그 뿐이다. 그들의 논리가 받아들여지는 순간 우리가 살고 있는 체계는 단 한 순간에 무너지기 때문이다. 사실 정상성이라는 영역은 모순적이게도 가장 강력한 동시에 단 한순간에 부서질 가능성을 동시에 지닌다. 왜냐하면, 이상함으로 치부되는 것들이 우리들이 공통적으로 사유하는 공간에 위치하는 순간 정상성의 영역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형태를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사유하는 공간에는 미세한 틈이 존재한다. 그 미세한 틈은 아주 작지만 동시에 가장 크다. 우리의 세계가 단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아주 작지만 가장 큰 가능성이 존재한다. 지금까지 인간의 합리성과 이성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소설 속 세상의 본질과 의미에 관한 성찰이었다면, 지금부터는 그 세계관 속에서 진행되는 서사 그 자체에 집중해보자. 콜랭과 클로에의 신혼 여행은 그들에게 행복감을 주는 동시에 클로에의 폐 속에 수련이 자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클로에의 건강을 위해 콜랭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소비할 뿐만 아니라 그녀를 위해 무조건적 헌신에도 불구하고 클로에의 건강은 더욱 악화된다. 결국 클로에는 생을 마감하게 되고, 콜랭은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그녀의 마지막을 초라하게 장식한다.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는 그녀와 그녀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은 불행한 사랑이야기에 불과한 것인가? 그것은 죽음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항상 우리를 둘러싼 죽음에 대한 단적인 모습을 이야기의 구조를 빌려 말하고 있다. 흔히, 죽음은 우리에게 반드시 회피하고 싶은 삶의 대극을 의미한다. 우리는 죽음을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이용해서라도 죽음과 멀어지려 노력한다. 자연적으로 인간은 욕망을 계속해서 충족시키려는 본능을 지니기 때문이다. “죽음은 저쪽, 자신은 이쪽”이라는 단절적 사고는 우리에게 상식적으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불연속적 사유는 죽음을 단순한 것으로 환원시킨다. 콜랭과 클로에의 마지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죽어가는 클로에의 모습 자체는 죽음이 우리 삶을 맴돈다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죽음은 항상 그들의 옆에 있었다. 그들이 처한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상황은 그들의 삶 속에서 항상 내재했다. 다만, 그들이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사랑을 빙자한 죽음의 계속성을 보여준다. 죽음은 우리의 삶의 일부이다. 죽음은 인간이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지워버릴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음은 언젠가 확실히 우리들을 손아귀에 넣는다. 삶의 한복판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 콜랭과 클로에라는 두 인물이 만들어내는 연애 따위는 죽음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소설의 서사적 흐름은 클로에의 죽음으로 그 끝을 맞이한다. 삶을 둘러싼 죽음 혹은 극중 인물의 파국이 서사의 종결이라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논의점은 명확해진다. 인간 존재는 죽음과 고통으로 둘러싸인 삶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문제로 분명해진다.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에 내재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은 모든 생명체에 내재하지만, 죽음을 인식하고 사유하는 존재는 인간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확정적으로 단정하고 제시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음이라는 문제가 자신의 삶에서 가장 고귀하고 완전한 체계를 제시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완성시킬 수 있는 원리를 스스로 창안할 기회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고통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은 인간에게 문제를 해결할 보편적 법칙의 형태를 제공하지 않지만 인간 스스로가 고통을 극복할 원리를 능동적으로 수행하게 한다는 점이다. 죽음과 고통은 우리 삶을 무너뜨리는 동시에 지탱하는 모순적 구조를 지닌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의문점이 발생한다. 그것은 초현실주의의 수 많은 작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월의 거품>이라는 소설에서 무엇이 같은 맥락의 수 많은 작품을 제치고 가치를 창출하는가” 혹은 “무엇이 해당 소설의 서사 구조 자체를 특별한 것으로 간주하게 하는가?”라는 질문과 맥락이 같다. 다시 말하면, 도대체 무엇이 이 소설 자체에 유일함을 제공하는가? 논의에 앞서, 세상에 존재하는 초현실주의적 맥락의 작품을 모두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제까지 경험한 작품만으로 한정하겠다. <세월의 거품>이라는 서사를 특정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관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라고 정의했을 때, <세월의 거품>은 세 가지 가치를 지닌다. 하나는 특정 세계관을 형성함으로써 현실 세계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또 다른 체계를 형성한다는 것. 다음은 이러한 비논리적 체계가 소설 속 세계관에서는 진리라는 점에서 유발되는 간극에 의해 희극성을 유발하는데, 이것이 현실에 존재하는 정상성의 영역을 붕괴할 가능성을 지닌다는 것. 마지막으로, 극중 인물의 죽음으로 소설이 종결됨으로써 인간을 항상 맴도는 죽음의 내재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사유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세 가지 가치는 각각 <세월의 거품>이라는 소설 자체에 토대가 될 뿐 아니라, 서사의 축을 담당한다. 세 개의 축은 평면성을 거부하고 소설 자체에 입체성을 부여한다. 비합리적 세계관과 희극적 부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형성하고,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파국과 죽음으로 수렴한다는 것은 ‘시간’이 흐른다는 것에 대한 고민의 결과이다. 즉, <세월의 거품>은 공간과 시간을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기술에 의한 영상 촬영이 가능함을 배제한다면, 사진, 회화, 등의 다른 예술적 영역에서 기술의 한계 혹은 작품의 고정성으로 인하여 성취될 수 없는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동시에 활자와 종이만으로 구축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의를 지닌다. 이 소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해되지 않은 세계로 가득 차 있는 서사 속 세계에서 우리의 정상성의 영역을 불연속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남녀가 혼인을 하는 것은 우리의 세계에서도 발생하지만 ‘저들’의 세계에서도 일어난다. 이러한 정상성 영역의 비연속적이고 불규칙적 출현은 그들의 세계를 더욱 이해할 수 없게 ‘혼란’을 야기시킨다. 왜냐하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은 완전한 허구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서사의 세계는 현실과 현실을 뛰어넘은 세계를 결합시킴으로써, 이 세계 자체가 현실인지 상상 속 세계인지 구별할 수 없게 한다, 이러한 방식은 이야기 속 세상을 정상성의 영역과 연관시키는 한편, 현실 세계와 전혀 상관 없는 공간으로 치환한다. 이러한 세계관의 구조는 소설 속 세계관의 존재할 수 있음을 보증하는 장치가 된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우리가 실존하는 세계의 논리가 변동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설계는 부정확하지만 예리하게 작가의 의도를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 <세월의 거품>은 세계가 우리에게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사유와 체계의 해방이라는 가치 측면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이 진실이라 생각하고 그것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착각한다. 그것은 인간이 오만에 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누구도 정의 내릴 수 없다. 현실에서 이해되지 못하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름’은 공간과 시간에 따라 상대적이며 나아가 이는 우리가 믿음에 의해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붕괴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모든 것은 단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이것을 감히 ‘진리’라 하겠다. 인간은 수천년 동안 합리성과 이성으로 자기 자신을 포장하는 동시에 자신들과 ‘다름’의 형태를 취하는 모든 것들을 억압해왔다. 인간 역사는 폭력의 누적의 결과이다. 하지만, 상상력 혹은 상상계는 세상을 둘러싼 기호화 된 모든 체계를 거부한 절대적 주관성을 뜻한다. 그것은 지각의 층위에서는 허위이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진실된다. ‘다름’의 세계는 항상 존재했다. 다만 그것들은 체계가 우리의 눈을 가렸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림자였다. 인간은 자기 오판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눈으로 그림자가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그것은 현실을 넘어선 진실을 파악하는 뒤집힘이다. 이러한 뒤집힘은 현실 세계를 영위하는 인간에게 ‘웃음’을 촉진한다. 그것의 원인은 두 세계 사이에 사유적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초현실적 형태와 희극적 부조리는 모든 사물과 개념의 약호화와 일반화에 맞서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는 해방의 기능을 수행한다. 또한, <세월의 거품>은 극중 인물이 죽어가는 모습과 죽어가는 사람을 보는 고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사유를 촉진한다. 사실, 모든 마무리의 결과가 ‘부족함’을 특성으로 한다면, 그것은 생각의 공간을 창출한다. 인간은 그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우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곧 사유의 단면적인 형태를 취한다. 죽음의 모습만을 목격한 독자들은 그 이후의 장면은 그들 스스로의 몫이 된다. 그 몫은 결국 자신에게 스며들어 그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금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표로 출현한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 항상 내재되어 있다. 고통 또한 그 맥락을 같이한다. 고통 없이 연속적인 행복만으로 충만한 그윽한 삶이란 있을 수 없다. 행복이 행복인 것은 불행이 정반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불행안에서 그 존재의 의미를 지닌다. 우리의 영혼을 가차없이 혹인 자비없이 흔드는 이 ‘불순물’은 그러나, 여지없이 우리를 끊임없이 사유하게 만든다. 죽음은 인간에게 죽음 그 자체를 해소시킬 능동적 태도를 끊임없이 갈구하게 함으로써, 우리 삶의 동력이 된다. 죽음이 항상 내 눈 앞에 존재한다면, 그것을 제거할 무엇인가를 찾게 만드는 것. 그것이 죽음의 가장 본질적 의미에 가깝다. 삶의 끝이라는 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인간으로 태어나 ‘사유’할 개별적 원리를 깨우치게 한다. 이 소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사랑 이야기가 내게는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며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 이야기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질문이다. 더 집약적으로, 누군가 내게 이 소설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묻는 다면, 나는 ‘성찰’이라는 두 글자를 적어서 보여주겠다. ‘성찰’은 절대적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오만’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나로 하여금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이 고개 숙임은 본질적인 ‘나’ 자신을 관찰하게 만든다. 이 관찰은 ‘나’ 자신에 대한 이해를 촉진한다. 사실, 이 서사에 대한 각자의 해석은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음으로, 소설 이야기는 고정된 형태를 지니지 않는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 소설을 콜랭과 클로에가 만들어내는 비극적이지만 영원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말도 안되는 허구적 코미디라고 할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사랑에 미쳐 재산을 탕진한 멍청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 순간 꿈의 상태에서 놓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어느 누군가가 내게 “당신의 해석은 틀린 것 같다.”라는 의문으로 나의 관점과 해석에 돌멩이를 던진다면, 나는 보리스 비앙이 말한 것을 그에게 똑같이 말하겠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했음으로, 이 이야기는 완전한 사실이다.”< 저작권자 © 광운미디어위원회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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